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자료사진=연합뉴스]
한미 관세 협상의 마감 시한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을 이끄는 재계 총수들이 잇달아 미국으로 출국하여 협상 타결을 위한 총력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이번 협상이 한국 경제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 주력 산업 분야의 최고 경영진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현지에서 협상 지원에 나선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30일 현재까지 한화그룹 김동관 부회장을 시작으로, 국내 재계 1위인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3위인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연이어 방미 행렬에 합류했다. 이들은 각각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 한국의 핵심 수출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번 관세 협상의 결과가 자사 사업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재계 총수들의 잇따른 워싱턴 방문에 대해 "저희가 요청한 것은 아니고, 기업집단들에도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가서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정부의 공식 요청이 아닌 기업들의 자발적 판단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 발언으로, 민간 차원에서도 이번 협상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 총수들이 직면한 상황은 매우 절박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경우, 지난 4월부터 부과된 미국의 자동차 관세로 인해 2분기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 대비 20% 가까이 감소하는 등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이는 관세가 단순한 정책적 이슈를 넘어 기업 실적에 즉각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특별한 위치에 있다. 그는 미국이 큰 관심을 보이는 조선업 협력과 관련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국 현지 조선소를 보유한 한화오션을 이끌고 있다. 김 부회장은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제안한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구체화 등을 조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전략적 접근으로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우에도 상황이 급박하다. 반도체가 추가 관세 대상 품목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어 관세 협상의 추이에 극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통령실은 이 같은 배경을 설명하며 재계 총수들의 방미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시사했다.
이번 방문에서 각 총수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현지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정부의 관세 협상을 측면에서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대표적인 '미국통' 경제인인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도 지난주부터 미국을 찾아 상하원 의원들을 만나며 협상 타결을 위한 막후 지원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정부와 민간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다.
정의선 회장은 특히 강력한 미국 내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직접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루이지애나주의 철강 공장 건설 등을 포함한 21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성 김 대외협력 사장을 통해 미국 내에 구축한 두터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자동차 품목 관세 인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기대된다.
이재용 회장도 강력한 투자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2030년까지 현지 반도체 생산 거점 마련을 위해 370억 달러, 한화로 51조 원 이상을 투자한다는 구상을 현지 정재계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 약속은 미국 측의 관세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협상 카드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김동관 부회장은 가문 대대로 이어온 공화당 인맥을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는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과 무도회에 참석하며 마크 루비오 국무장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등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과 직접 만난 경험이 있다. 아버지 김승연 회장 때부터 내려오는 공화당과의 깊은 관계를 바탕으로 협상 타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이러한 민간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브리핑에서 "개별 민간기업이 그동안 구축한 미국 내 네트워크가 상당하다"며 "그 네트워크를 가지고 정부가 협상하는 큰 틀에 대해 필요한 경우 공유하고 있고, 우리를 대신해 민간 입장에서 중요성을 강조해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기업들은 협상 데드라인에 맞춰 미국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실질적 조치들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이는 협상력 제고를 위한 전략적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28일 미국 테슬라와 22조 8천억 원 규모의 역대 최대 규모 파운드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 계약에 따라 삼성전자는 내년부터 테일러 공장에서 테슬라의 차세대 AI칩인 AI6를 생산하게 된다. 이는 한미 간 첨단 기술 협력의 상징적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계약을 발표했다. 회사는 테슬라로부터 5조 9천442억 원 규모의 리튬인산철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는 전기차 시장에서 한미 기업 간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다. 셀트리온은 미국 내 바이오의약품 생산 공장 인수 입찰에서 글로벌 기업 두 곳을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인수 대상 공장은 미공개 글로벌 의약품 기업이 보유한 대규모 원료의약품 cGMP 생산 시설로, 미국 내 주요 제약산업 클러스터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 가치가 높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상황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무게감 있는 한국 주요 산업군 총수들이 한꺼번에 미국을 찾는 일은 극히 드물다"며 "각 산업을 대표하는 그룹 수장들이 전면에 나설 만큼 미국과의 협상 타결이 절박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재계 총수들의 총출동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단순한 통상 현안을 넘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보여주며, 정부와 민간이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하여 협상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이틀 후 협상 결과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힐링경제=윤현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