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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재정부담 완화를 위해 거론되고 있는 기초연금 수급개시 연령 상향 조정이 노인 가구의 경제적 불안정성을 크게 높이고, 특히 저소득층 노인을 저임금·불안정 노동시장으로 내몰 수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는 그동안 정부가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검토해온 기초연금 개혁 방안이 실제로는 고령층의 생계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26일 국민연금공단이 발표한 제10회 국민노후보장패널 학술대회 연구결과에 따르면, 호서대 사회복지학부 김성욱 부교수가 수행한 '기초연금 수급연령 상향과 노인 가구의 경제적 불안정성 간 관계' 연구에서 이같은 결과가 도출됐다.
이번 연구는 국민노후보장패널 데이터를 활용해 현행 65세인 기초연금 수급연령을 1년에서 4년까지 단계적으로 늦추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각각이 노인 가구의 경제적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단순한 소득 변화뿐만 아니라 노동시장 참여, 가족 지원 등 복합적인 요인들을 함께 고려했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차별화된다.
연구결과 기초연금 수급연령을 단 1년만 늦춰도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66세 노인 가구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16.9%(경상소득 기준)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초연금이 고령층의 경제적 안정성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수급연령을 4년 상향 조정할 경우 경제적 불안정성이 64.3%까지 치솟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치는 연금 수급 지연이 단순히 소득의 일시적 감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령층의 소득 기반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임을 시사한다. 특히 65세부터 기초연금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노후를 준비한 현재의 예비 노인층에게는 예상치 못한 경제적 충격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 중 하나는 기초연금 수급연령 상향 조정의 충격이 소득계층별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소득 하위 20%에 해당하는 1분위 가구는 수급연령을 4년 상향할 경우 경제적 불안정성이 약 46% 증가하는 반면, 상위 20%인 5분위 가구는 거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기초연금이 각 소득계층의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노인에게 기초연금은 생계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안정적 공적 이전소득이지만, 고소득층에게는 부수적인 소득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같은 정책 변화라도 저소득층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충격이 되지만, 고소득층에게는 미미한 영향에 그치는 것이다.
이는 기초연금 수급연령 상향 조정이 단순한 재정 효율화 수단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저소득층 노인에게 집중적인 부담을 전가하는 역진적 정책 개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정책 변화는 노인층 내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킬 우려가 있다.
연구는 또한 기초연금 수급연령 상향 조정이 노인을 '비자발적 노동'으로 내모는 구조적 기제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기초연금 축소로 생계가 어려워진 노인들은 어쩔 수 없이 노동시장에 재진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질이다.
고령층이 접근할 수 있는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저숙련의 불안정한 2차 노동시장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체력적·인지적 능력의 한계, 기술 변화에 대한 적응력 부족, 연령 차별 등 구조적 요인들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기초연금 개혁이 고령층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거나 '생산적 노후'를 지원하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기보다는, 불안정한 노년을 저질 노동으로 겨우 버티게 만드는 부정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나 기술 습득이 어려운 노인들의 경우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 일해야 할 위험이 크다.
이번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발견은 '가족이 부양하면 된다'는 기존 통념에 대한 실증적 반박이다. 기초연금 수급연령 상향 조정을 지지하는 논리 중 하나는 공적 지원이 줄어들면 자녀 등 가족의 사적 지원이 늘어나 이를 보완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연구결과는 이러한 기대가 현실과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분석 결과 자녀 등이 제공하는 사적 이전소득은 노인의 취업률을 낮추는 효과(구축효과)는 있었지만, 기초연금이 삭감되더라도 가족의 지원이 더 늘어나는 보완 관계는 관찰되지 않았다. 이는 가족의 경제적 지원 능력에도 한계가 있고, 가족 관계의 복잡성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급연령 상향으로 삭감되는 평균 연금액이 노인들이 받는 평균 사적 이전소득보다 1.3~1.5배 더 크다는 점이다. 이는 가족 부양만으로는 공적 지원의 공백을 메울 수 없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수치다. 현대 사회에서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자녀 세대도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 부양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결과는 한국의 노인빈곤 현실을 고려할 때 더욱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빈곤율(상대적 빈곤율)은 40%를 넘어 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는 현재도 많은 노인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황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초연금 수급연령을 상향 조정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인들을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국민연금 수급액이 충분하지 않거나 아예 받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은 마지막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마저 늦춰진다면 노인 빈곤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김성욱 부교수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기초연금 수급연령 상향은 단순한 재정 효율화 수단이 아니라 고령층의 생계 기반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정책 개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개혁 논의 시 재정적 측면과 동시에 이에 따라 발생하는 노인 가구의 경제적 불안정성 심화와 불평등 확대 문제를 반드시 고려하고 정교한 보완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는 정부가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기초연금 개혁을 추진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수급연령 상향 조정시 저소득층에 대한 별도 지원책 마련, 고령자 친화적 일자리 창출, 점진적 시행을 통한 충격 완화 등의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번 연구는 사회보장제도 개혁이 단순히 재정적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되며, 제도의 수혜자들에게 미치는 실질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특히 취약계층에게 미치는 차별적 영향을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정책의 형평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