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황 '레오 14세' [자료사진=연합뉴스]

전례 없는 변화의 순간이 가톨릭 역사에 기록되었다. 세계적 혼란과 갈등이 지속되는 2025년 5월, 가톨릭교회는 2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출신 교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133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은 5월 8일(현지시간) 제267대 교황으로 미국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을 선출했다.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가 시작된 지 단 이틀 만에, 그리고 네 번째 투표만에 새로운 교황의 선출이 확정되었다.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교황으로서 '레오 14세'라는 즉위명을 선택했다. 가톨릭 전통에서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며, 강인함과 용기, 리더십을 상징한다. 이 이름의 선택은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 속에서 교회가 나아갈 방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955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레오 14세는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다. 유로뉴스에 따르면,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 교황이 배출된 것은 이번이 최초의 사례다. 이는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평가받고 있다.

레오 14세의 특별한 배경은 그가 단순히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넘어선다. 그는 미국 국적자이면서도 20년간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2015년 페루 시민권도 취득했다. 같은 해 페루 대주교로 임명되어 현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그의 이력은 세계 가톨릭교회의 주목을 받았다.

AP 통신의 분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미국이 전 세계에 행사하는 '세속적' 영향력 때문에 미국인 출신 교황 선출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바티칸 소식통을 인용해 레오 14세를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라고 표현했다. 빈민가와 소외된 지역에서의 오랜 사목 활동은 그를 전형적인 미국인 성직자의 이미지와 차별화했으며, 이것이 교황 선출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레오 14세는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임명된 바 있다. 교황청 주교부는 신임 주교 선발을 관리·감독하는 핵심 조직으로, 가톨릭교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으로서 주교 후보자 명단을 결정하는 투표단에 여성 3명을 처음으로 포함시키는 개혁 조치를 주도했다. 그러나 외신들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을 유지하면서 교회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레오 14세는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 능력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다국어 능력은 전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들과 소통하는 데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 교황은 선출이 확정된 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강복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첫 발언으로 이탈리아어로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La pace sia con tutti voi)이라고 말했다. 이어 페루에서의 경험을 언급하며 스페인어로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서 특정 국가나 문화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전 세계인에게 내리는 첫 사도적 축복인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로마와 전 세계에)를 라틴어로 진행함으로써 교회의 오랜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레오 14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선출 당시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이유로 착용하지 않았던 교황의 전통적인 복장인 진홍색 모제타(어깨 망토)를 착용하고 대중 앞에 등장했다. AP 통신은 이를 전통으로의 회귀를 어느 정도 암시하는 행보로 해석했다.

마테오 브루니 교황청 대변인은 새 교황명 '레오 14세'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19세기 말 노동권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레오 13세는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새로운 사태)을 통해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 조건 보장, 노동조합 설립 권리 인정, 사유재산의 권리를 인정하되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 책임 등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브루니 대변인은 "레오 14세라는 교황명의 선택은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으로 시작된 현대 가톨릭 사회 교리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라며 "또한 이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는지 교회가 고민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설명했다. 이는 새 교황이 현대 사회의 기술 발전과 노동 환경 변화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임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주목받고 있다.

새 교황이 선출된 것은 지난달 21일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이후 17일 만의 일이다.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교황 즉위 미사는 일반적으로 선출 후 일주일 내에 거행된다.

레오 14세 교황은 선출 다음 날인 5월 9일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들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5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서 첫 축복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5월 12일에는 전 세계 언론인들과 첫 공식 대면 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 출신 교황의 탄생을 환영하는 뜻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그가 첫 번째 미국인 교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말로 영광"이라며 "나는 교황 레오 14세를 만나길 고대한다"고 전했다.

레오 14세의 선출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미국인 최초의 교황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그의 다양한 국제 경험과 균형 잡힌 신학적 관점은 세계적 혼란기에 교회가 나아갈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이제 레오 14세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갈지, 그리고 그의 지도력 아래 가톨릭교회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주목하고 있다. 특히 그가 강조할 것으로 예상되는 노동권, 사회 정의,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적 문제들은 앞으로 교회의 중심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 혼란의 시대에 등장한 최초의 미국 출신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힐링경제=김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