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연합뉴스]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스러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건강재난 통합대응을 위한 교육연구단이 지난달 전국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놓여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수록 울분 정도가 높아지는 상관관계가 확인되어 사회 구조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이번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사회 구성원의 48.1%가 전반적인 정신건강 수준이 '좋지 않다'고 응답했다. '보통'이라고 답한 비율은 40.5%, '좋다'고 답한 비율은 11.4%에 불과했다. 5점 척도로 환산하면 평균 2.59점으로, '보통' 수준인 3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신건강이 좋지 않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그 주된 원인으로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37.0%)를 가장 많이 꼽았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타인·집단의 시선과 판단이 기준이 되는 사회 분위기'(22.3%)가 지목됐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과도한 경쟁 구조와 집단주의적 문화가 개인의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진이 자가측정 도구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2.8%는 '높은 수준의 심각한 울분'(2.5점 이상)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54.9%는 울분의 고통이 지속되는 '장기적 울분 상태'(1.6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민 절반 이상이 만성적인 분노와 억울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울분의 정도는 연령과 소득 수준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30대의 심한 울분 비율은 17.4%로 60세 이상(9.5%)보다 훨씬 높았다. 소득 수준별로는 월 소득 200만원 미만 집단의 심한 울분 비율이 21.1%로, 월 소득 1천만원 이상 집단(5.4%)의 약 4배에 달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자신을 '하층'으로 인식하는 집단의 심한 울분 비율이 16.5%로 가장 높았지만, '상층' 집단에서도 15.0%의 높은 수치를 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중간층'에서는 9.2%로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69.5%가 '기본적으로 세상은 공정하다'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국민 10명 중 7명이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개인적 차원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58.0%가 '나는 대체로 공정하게 대우받는다'고 답해, 사회 전체의 공정성보다는 개인적 경험에서의 공정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면 울분 수준은 공정에 대한 신념과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공정성 신념이 높아질수록 울분 점수는 낮아졌으며, 일반적 공정 인식 점수가 평균보다 낮은 집단은 평균점 이상 집단보다 울분 정도가 높았다. 이는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정신건강과 직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의 정치사회 사안별로 울분의 정도를 측정한 결과, '입법·사법·행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로 울분을 느꼈다는 비율이 85.5%로 가장 높았다. 이어서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85.2%),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의료·환경·사회 참사'(85.1%) 등이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이는 국가 기관의 투명성과 책임성 부재가 국민의 울분을 크게 자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응답자의 47.1%는 지난 1년 동안 건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연령별로는 40대의 스트레스 경험 비율이 55.4%로 가장 높았으며, 소득 수준별로는 월 소득 200만원 미만 구간의 경험 비율이 58.8%로 가장 높았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스트레스 경험 비율은 낮아져 월 소득 1천만원 이상 구간에서는 38.7%를 기록했다.
스트레스 유발 원인으로는 '개인·가족의 건강 변화'(42.5%)와 '경제 수준 변화'(39.5%)가 높게 나타났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응답자의 27.3%가 지난 1년 중 기존에 하던 역할이나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정신건강 위기를 경험했다고 답했으며, 이들 중 51.3%는 자살을 생각했고, 그중 13.0%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고 응답한 것이다.
정신건강 위기를 경험한 이들 중 60.6%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그 주된 이유는 타인의 시선이나 낙인 등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스트레스 경험 시 대처 방법으로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한다'가 39.2%로 가장 높았고, '혼자 참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가 38.1%로 뒤를 이었다.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답한 비율은 15.2%에 불과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며,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응답자들의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는 '만족'(34.3%), '보통'(40.1%), '불만족'(25.6%)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를 총괄한 유명순 교수는 "사회 안전·안정성을 높게 유지하고, (사회적)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 개인과 집단의 정신건강을 위하는 길"이라고 해석하며, "앞으로 의료적 노력은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 정신건강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 위기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요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울분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만큼, 사회적 신뢰와 공정성을 회복하는 것이 정신건강 문제 해결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의료적 접근과 함께 사회 시스템 전반의 개선이 병행되어야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