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실업급여 인정 위해 상담대기중인 시민들

[자료사진=연합뉴스]

정부가 고용보험 제도 시행 30년 만에 획기적인 개편을 단행한다. 그동안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했던 고용보험 가입 자격을 소득 기준으로 바꿔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등 새로운 고용 형태에서 일하는 취약 근로자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개편으로 고용보험이 모든 일하는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사회 안전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용노동부는 7일 '고용보험법' 및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1995년 고용보험 시행 이후 30년간 유지해 온 근로자의 고용보험 적용기준을 근로시간에서 소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고용보험 제도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변화로 평가된다.

현재 고용보험 제도는 월 60시간 이상, 즉 주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만 가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기준은 1995년 고용보험이 처음 도입될 당시 대부분의 근로자가 정규직 형태로 일정한 근무시간을 가지고 있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노동시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현재의 근로시간 기준은 급변하는 노동시장 환경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긱 워커 등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일정한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렵거나 여러 일자리에서 초단기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급증했다. 이들은 충분한 소득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시간 기준 때문에 고용보험 가입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배달 라이더, 온라인 콘텐츠 제작자, 플랫폼 기반 서비스 제공자 등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일자리가 등장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근로시간 개념으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일하면서도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기존 고용보험 기준으로는 이들을 보호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번 개정안에 따르면 근로시간과 관계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노동자들은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복수 일자리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의 경우 각각의 사업에서 얻는 소득이 기준에 미달하더라도 합산한 소득이 소득 기준을 넘는 경우 근로자 신청에 따라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늘어나고 있는 '포트폴리오 워커'들을 위한 맞춤형 대책이다. 예를 들어 오전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배달 일을 하며, 저녁에는 온라인 강의를 하는 식으로 여러 일자리를 병행하는 근로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존 제도로는 각각의 일자리에서 주 15시간 이상 일하지 않으면 고용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었지만, 새로운 제도에서는 모든 일자리에서 얻는 소득을 합산해 기준을 충족하면 가입할 수 있게 된다.

노동부는 적용기준이 되는 구체적인 소득액은 노·사·전문가의 논의를 거쳐 시행령에서 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일방적인 정부 결정이 아닌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의미다. 소득 기준 설정은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너무 높게 설정하면 여전히 많은 근로자들이 사각지대에 남을 수 있고, 너무 낮게 설정하면 재정 부담이 과도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최저임금 수준이나 평균 임금의 일정 비율 등을 기준으로 하는 방안들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생계를 위해 일하는 근로자들이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적용기준이 소득으로 바뀔 경우 행정 효율성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세 소득자료에 대한 전산 조회만으로 고용보험 미가입자의 가입 누락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근로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복잡한 서류 검토와 현장 조사가 필요했지만, 소득 기준으로 바뀌면 국세청의 소득 신고 자료를 활용해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행정 편의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던 근로자들을 능동적으로 발굴해 가입을 유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입법예고는 2023년 3월부터 노·사·전문가가 11차례에 걸쳐 논의한 결과를 토대로 고용보험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1년 4개월에 걸친 사회적 논의와 합의 과정을 거쳐 마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노동계에서는 그동안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고, 경영계에서도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맞는 새로운 기준의 필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해왔다. 전문가들 역시 현재의 근로시간 기준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해왔다.

노동부는 적용기준 변경과 함께 고용보험 행정 전반의 개편도 추진한다. 국세 소득신고로 대체할 수 있는 고용보험 신고는 폐지 또는 간소화하고, 고용보험 행정을 통해 구축된 실시간 소득자료를 각종 일자리 사업 지원 대상 발굴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도 구축할 계획이다.

이는 고용보험 제도를 단순히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제도에서 벗어나 종합적인 고용 서비스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미다. 실시간 소득자료를 활용하면 취업 취약계층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맞춤형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노동부는 향후 40일간 입법예고 기간에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고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개정안을 오는 10월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국회에서의 심의 과정에서 추가적인 논의와 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회적 합의를 거쳐 마련된 개정안인 만큼 큰 무리 없이 통과될 것으로 전망된다.

권창준 노동부 차관은 개정안에 대해 "고용보험이 앞으로 모든 일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고용 안전망으로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고용보험이 특정 형태의 근로자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모든 근로자를 포괄하는 보편적 사회보장제도로 발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번 고용보험 개편은 단순한 제도 개선을 넘어 한국 사회의 고용 안전망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한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으로 인해 전통적인 고용 형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보장제도도 이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30년 전 만들어진 기준을 과감히 바꾸어 현재의 노동시장 현실에 맞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하는 것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개편으로 그동안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수많은 근로자들이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이 제도가 실제로 시행되면 한국의 고용보험은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포괄적이고 현대적인 사회보장제도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맞춰 진화하는 사회보장제도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