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연합뉴스]

18년 만에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의 이면에는 가입자들의 복잡하고 모순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을 40%에서 43%로 조정하는 '더 내고 더 받는' 방향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개혁 논의 과정에서 국민들은 연금 혜택 확대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재정 안정을 위한 강도 높은 개혁안에도 찬성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국민연금연구원이 18일 공개한 '제도 관련 인식 및 태도 분석' 보고서는 이러한 국민적 인식의 혼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조사는 연금 개혁 논의가 한창이던 작년 8월 국민연금 가입자 2,821명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향후 2단계 구조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 가입자 10명 중 9명 이상(92.7%)이 "연금 개혁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이는 국민연금 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행 제도로는 2057년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가입자들 스스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싼 가입자들의 인식에서 나타났다. 연금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개혁 방안에 대해서는 상당한 혼란과 모순이 존재했던 것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는 가입자들이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국민연금 공론화위원회가 채택한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 방안에 동의한다고 답한 집단이 전체의 56.43%를 차지했다. 이는 보장성 강화에 대한 선호가 뚜렷함을 보여주는 결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들 집단이 보인 태도는 예상과는 달랐다. 4점 척도로 측정한 동의 수준에서, 보장성 강화를 원한다고 답한 이들이 동시에 강도 높은 재정 안정 방안에도 높은 지지를 보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연금액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자동안정화장치' 도입에 2.87점, 기존 가입자와 신규 가입자를 분리하는 '신구연금 제도' 도입에 2.92점, 납입한 보험료와 이자만큼만 연금을 지급하는 '확정기여형(DC) 전환'에 2.78점의 동의도를 나타냈다.

이는 매우 모순적인 결과다. 자동안정화장치나 확정기여형 전환은 사실상 연금 급여 수준을 삭감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연금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연금 급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에도 찬성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모순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가입자들이 복잡한 개혁안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보장'과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추상적으로 원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국민들이 연금 개혁의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구체적인 개혁 방안들이 갖는 의미와 파급효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는 또한 세대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극명한 차이는 연금 수급 연령 조정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났다. 현행 65세인 연금 수급 연령을 68세로 늦추는 방안에 대해 30대 이하 청년층의 동의 수준은 4점 만점에 평균 2.42~2.62점으로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반면 은퇴가 가까운 40대 후반 이상부터는 평균 2.08~2.20점까지 떨어지며 뚜렷한 반대 여론을 보였다. 이는 연금 수급 연령 조정이 당장 자신에게 적용될 가능성이 낮은 청년층과 곧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 간의 이해관계가 상반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보험료 인상 방식에 대해서도 세대별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보험료 인상 속도를 연령에 따라 차등 적용하자는 제안에 대해 청년층(2030대)의 지지도는 평균 2.833.02점으로 높았지만, 보험료 부담이 더 클 수 있는 40대의 지지도는 평균 2.58~2.64점으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는 각 세대가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혁 방안을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금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정책 우선순위에서도 세대별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는 '저소득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이 31.9%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두루누리 사회보험료 지원'(20.2%), '출산크레딧'(18.6%)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세대별로 보면 청년층은 출산크레딧을, 중장년층은 실업크레딧을 선호하는 등 자신의 생애주기적 특성에 따라 정책 선호도가 갈라지는 현상을 보였다. 이는 연금 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세대별 이해관계 조정이 얼마나 복잡한 과제인지를 보여준다.

연구진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가입자들이 복잡한 구조개혁 방안에 대해 충분한 이해 없이 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자동안정화장치나 확정기여형 전환 같은 생소하고 복잡한 개념들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막연히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진정한 사회적 합의는 국민들이 개혁안의 내용과 파급효과를 정확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가입자들이 개혁안의 실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찬성한다면, 이는 '허상의 합의'에 불과할 수 있다.

실제로 자동안정화장치는 인구 고령화나 경제성장률 변화에 따라 연금 급여를 자동으로 조정하는 제도로, 경우에 따라서는 연금액이 삭감될 수도 있다. 확정기여형 전환 역시 개인이 납입한 보험료와 운용수익에 따라서만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현행 확정급여형에 비해 연금 수준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복잡한 여론 속에서도 국회는 결국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소폭 조정하는 '모수 개혁'으로 첫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이번 1단계 개혁만으로는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완전히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정부는 향후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연계 등 보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2024년 조사에서 나타난 가입자들의 '모순된 인식'은 2단계 구조개혁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고 있다.

연구진은 "보장성 강화와 재정 안정화에 대한 선호가 혼재된 양상에 대한 원인 분석이 필요하다"며 "수용도 높은 개혁을 위해서는 다양한 개혁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고, 세대·계층 간 갈등을 조정할 제도적 기제가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번 조사 결과가 던지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국민연금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단순히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개혁의 필요성과 방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구조개혁은 모수개혁보다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변화를 수반한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관계 재정립, 퇴직연금과의 연계 강화, 다층 노후소득보장체계 구축 등은 모두 국민들의 노후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변화들이다.

따라서 정부와 국회는 앞으로 추진할 구조개혁에 대해 국민들에게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복잡한 제도 변화의 내용과 예상되는 파급효과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세대별·계층별 이해관계의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연금 개혁이 단순히 재정 안정화나 보장성 강화라는 이분법적 선택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지속가능한 노후보장을 위한 종합적 접근이라는 점을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8년 만에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의 첫 단추는 끼워졌지만, 세대 간 갈등을 통합하고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완전히 담보하기 위한 진짜 과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개혁안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