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연합뉴스]
국민연금을 받는 노년층이 건강보험료와 소득세라는 이중 부담에 시달리면서 실제 손에 쥐는 연금액이 예상보다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2022년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이후 연금소득으로 인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잃고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면서 월 수십만 원의 추가 부담을 져야 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어 은퇴 준비에 비상등이 켜졌다.
17일 국민연금연구원이 발표한 '건강보험과 연금소득 과세가 국민연금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국민연금 수급자들이 직면한 심각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존에 자녀의 직장 건강보험에 피부양자로 등록돼 있던 연금 수급자들이 대거 지역가입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 원인은 2022년 9월 시행된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2단계 개편이다. 이 개편으로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 기준이 연 3천400만원에서 2천만원으로 대폭 강화됐다. 연간 1천400만원이라는 상당한 소득 기준 하향 조정으로 인해 많은 연금 수급자들이 자격 요건에서 탈락하게 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로 인해 60세 이상자가 있는 피부양 가구의 7.2%에 해당하는 약 24만9천 가구가 지역가입자로 전환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새롭게 부담해야 할 건강보험료는 연평균 264만원, 월평균 약 22만원에 달한다. 노후 생활비가 빠듯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월 22만원의 추가 부담은 가계에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일한 금액의 연금을 받더라도 연금의 종류에 따라 건강보험료 부담이 달라지는 '형평성의 덫'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현행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는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소득에는 보험료를 부과하지만, 기초연금이나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사적연금 소득에는 부과하지 않는 불균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별적 적용은 연금 수급자들 사이에 불공정한 부담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월 200만원의 연금소득을 전액 국민연금으로 받는 A씨의 경우, 200만원 전체가 건강보험료 부과 대상 소득으로 분류된다(소득의 50%가 반영).
반면 국민연금 100만원과 퇴직연금 100만원을 각각 받는 B씨는 국민연금 100만원에 대해서만 건강보험료를 부담하게 된다. 총 연금소득은 동일하지만 국민연금에만 의존하는 수급자가 건강보험료를 더 많이 내야 하는 불합리한 구조인 것이다.
세금 문제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기초연금은 전액 비과세 대상으로 분류돼 세금 부담이 전혀 없지만, 국민연금 노령연금은 과세 대상 소득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차별적 과세 체계로 인해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함께 받는 수급자가 전액 국민연금만 받는 수급자에 비해 실질 가처분소득이 더 높은 역설적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국민연금 제도의 근본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납부하고 더 오랜 기간 가입했던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세금과 건강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담 구조는 연금 수급을 앞둔 예비 수급자들의 행동 패턴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고서는 건강보험료 부담을 피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연금액이 많은 수급 예정자들이 정상적인 노령연금 대신 감액을 감수하고 '조기노령연금'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기노령연금은 법정 노령연금 수령 시기를 1년에서 5년까지 앞당겨서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1년 일찍 받을 때마다 연 6%씩(월 0.5%씩) 연금액이 영구적으로 삭감된다. 최대 5년을 앞당길 경우 30%가 감액돼 원래 받을 연금의 70%만을 평생 받게 된다. 구체적으로 5년 일찍 받으면 70%, 4년 당기면 76%, 3년 당기면 82%, 2년 당기면 88%, 1년 당기면 94%의 연금을 받는다.
이처럼 조기 수령 시 상당한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손해 연금'이라고 불리는 조기노령연금을 선택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큰 손실이다. 하지만 당장의 건강보험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런 불합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실질적인 보장성을 평가할 때 액면 연금액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와 세금을 제외한 '순연금소득'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연금액이 많아도 각종 공제와 부과금으로 인해 실제 수령액이 크게 줄어든다면 노후 보장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과 체계는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수십 년간 성실히 보험료를 납부해온 노력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입하고 더 많이 낸 사람이 더 큰 부담을 지게 되는 역진적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제언을 제시했다. 먼저 건강보험료를 부과할 때 국민연금 소득에서 기초연금액만큼을 공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간의 형평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또한 주택연금도 주택금융부채 공제 항목에 포함시켜 노후 주거 안정을 위해 주택연금을 선택한 수급자들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택연금은 노후 소득 보장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인데, 현재는 이에 대한 적절한 세제 혜택이 부족한 상황이다.
아울러 연금 수급 예정자들에게 세금과 건강보험료 부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사전에 안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예비 수급자들이 연금액만 확인하고 실제 부담해야 할 비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은퇴 후 예상치 못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급자들이 직면한 이중 부담 문제는 개별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연금, 건강보험, 세제 간의 연계성 부족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다. 따라서 각 제도를 개별적으로 개선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종합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특히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후 소득 보장의 핵심 역할을 해야 할 국민연금이 오히려 수급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구조로 운영된다면, 제도에 대한 신뢰도 하락과 함께 노후 빈곤 문제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수급자들의 실질적인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할 때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