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 14세 교황의 광장 순례 [자료사진=연합뉴스]
새 교황 레오 14세는 하얀색 의전 차량 '포프모빌'(popemobile)을 타고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천천히 순례하며 전 세계에서 모인 신자들과 눈을 맞췄다.
교황이 지나가는 곳마다 환호가 파도처럼 번졌고, 광장 왼편 발코니에 자리한 취재진도 그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교황의 위치는 멀리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외침과 손짓이 그의 이동을 따라 광장 전역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그의 포프모빌은 광장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을 벗어나 산탄젤로성까지 이어지는 직선 대로,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Via della Conciliazione)를 따라 늘어선 신자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교황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역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사목 표어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단순한 순례가 아닌, 모든 이에게 다가가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행보였다.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는 18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분위기는 그가 포프모빌을 타고 광장을 순례하면서부터 무르익었다.
이 전통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시절부터 시작됐으며,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포프모빌에서 내려 병자를 축복하고 아기를 안아 키스하며 소탈하고 겸손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레오 14세 교황은 차량에서 직접 내리지는 않았지만, 미소와 손짓으로 신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기를 들어 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어떤 신자에게는 손을 얹고 축복하며 직접적인 교감을 시도했다. 광장에는 "비바 일 파파(Viva il Papa)"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고, 신자들은 20분 넘는 그의 광장 순례를 숨죽인 감동 속에 지켜보았다.
순례를 마친 레오 14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있는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참배한 뒤, 즉위 미사가 열리는 야외 제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교황권을 상징하는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를 착용함으로써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로운 영적 지도자의 탄생을 알렸다. 팔리움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로서의 사명을, 어부의 반지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의미한다.
레오 14세는 성대한 환호와 박수 속에서도 침착하고 조용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새 반지가 끼워진 오른손을 바라보다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에게 부여된 사명과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이어진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우리는 증오와 폭력, 차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경제 논리로 인한 수많은 상처를 보고 있습니다”라며,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며, 평화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즉위 미사에는 각국 대표단이 참석해 그를 축하했다. 그는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적 존재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분은 지금 하늘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날 바티칸은 새벽부터 인파로 붐볐다. 각 구역마다 대형 스크린과 안내 요원, 간이 화장실이 배치되었고, 교통도 전면 통제되었다. 첫 미국인 교황을 보기 위한 미국인 신자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특히 페루 국기가 곳곳에서 나부꼈는데, 이는 레오 14세가 20년 넘게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현지인들과 깊은 유대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성조기를 어깨에 두른 미국인 페기 씨(75)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아름다운 미사였다. 같은 미국인으로서 첫 미국인 교황을 직접 본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사실 1년 반 전부터 준비한 여행이었고 원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 때에 비하면 이번 즉위 미사에 모인 인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당시에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대로 끝까지 발 디딜 틈 없이 신자들이 몰렸지만, 이번에는 보다 여유 있는 분위기에서 경건함을 유지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청 역사상 첫 미국 출신이자, 동시에 ‘하나 됨’과 ‘포용’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리더십의 상징이 됐다.
그의 첫 걸음은 겸손했고, 동시에 확고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을 향한 그의 시선은, 앞으로의 행보를 예고하는 듯했다.
그가 펼쳐나갈 교황직은 단순한 전통의 계승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이끄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될 것이다.
[힐링경제=차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