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연합뉴스]
디지털화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에서 현금 사용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신용카드와 간편결제 등 비현금 지급수단의 확산으로 지폐와 동전 사용이 줄어들고 있으며,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과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성장이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화폐 시스템의 신뢰 유지를 위해 실물화폐가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실시한 '2024년 지급수단·모바일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지급수단 중 현금 이용 비중(건수 기준)은 15.9%로 집계됐다. 이는 신용카드(46.2%)와 체크카드(16.4%)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지급수단이다. 모바일카드 사용(12.9%)도 현금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현금 이용 비중은 2013년 41.3%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2015년과 2017년에는 30%대를 기록했고, 2019년에는 26.4%, 2021년에는 21.6%로 감소했다. 약 10년 전에는 10번 결제할 때 4번은 현금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1~2번만 현금을 사용하는 셈이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20대는 체크카드를, 30~50대는 신용카드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은 현금 이용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이는 은퇴 후 신용카드 발급의 제약과 새로운 전자지급수단 이용에 대한 어려움 때문으로 분석된다.
개인이 지갑에 보유한 현금은 평균 6만6천원으로, 2021년 조사 결과(5만9천원)보다 7천원 증가했다. 이는 같은 기간 물가 상승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연령대별로는 50대(9만1천원)와 60대 이상(7만7천원)이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20대가 2만7천원으로 가장 적었다.
한국은행이 월드페이 설문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의 현금사용도는 10%로, 주요 40개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이는 전체 대상국의 단순 평균인 23%보다 낮은 수준이다.
선진국 중에서는 일본(41%), 스페인(38%), 독일(36%), 이탈리아(25%) 등이 높은 현금사용도를 보인 반면, 노르웨이(4%), 스웨덴(5%), 핀란드(7%) 등 북유럽 국가와 뉴질랜드(6%), 캐나다(6%), 호주(7%) 등 영연방 국가는 현금사용도가 낮았다.
한국은행은 "현금사용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제, 인구·사회구조, 문화·역사적 배경 관련 지표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는 현금 고사용국과 조건이 전반적으로 비슷하다"고 밝혔다. 1인당 GDP(2023년 기준 약 3만3천달러)는 현금 고사용국과 유사하지만, 디지털 기술 경쟁력은 현금 저사용국에 가깝다는 것이다.
인구와 국토 면적을 감안한 ATM 수는 고사용국들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정부 신뢰도와 위험회피 성향은 고사용국과 유사한 특성을 보였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현금사용도가 낮은 이유로 정부의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과 '여신전문금융업법' 등의 영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현금 사용 감소와 함께 '현금 없는 매장'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무인 키오스크 매장처럼 현금 결제가 불가능한 경우가 증가하고 있으며, '현금 없는 버스'도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는 2021년부터 현금 없는 버스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인천, 대전, 제주, 대구, 광주 등도 현금 승차 폐지를 시범 운영하거나 전면 폐지했다.
ATM 기기 수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ATM 기기는 2020년 8만7천773대에서 2022년 8만3천196대, 2023년 8만907대로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통화 가치에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실물화폐를 포함한 법정통화 수요를 대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일반 가상자산과 달리 가치가 안정적이어서 지급결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코인게코 자료에 따르면, 2024년 3월 말 기준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2천373억달러로, 전년 동기(1천332억달러) 대비 2배 가까이 성장했다. 현행법상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국내에서 발행할 수 없지만, USDT(테더) 등 미국 달러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해외 송금이나 가상자산 거래에 활용되고 있다.
최근 홍콩의 핀테크 회사 레돗페이(RedotPay)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비자 가맹점에서 결제할 수 있는 카드를 출시하고 한국 시장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행이 기관용 CBDC를 발행하고 예금 토큰 실험을 진행하면서 디지털 화폐 인프라 구축에 나서고 있어, 실물화폐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은 실물화폐 발행 중단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는 "한은은 실물화폐를 절대 없애지 않을 것"이라며 "디지털화폐는 전력이 끊기거나 통신이 안 되면 작동하지 않을 수 있고, 정보기술(IT)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실물화폐는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페이 등 디지털 지급수단을 믿고 쓸 수 있는 이유는 그 돈을 언제든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실물화폐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며 "화폐 시스템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은행은 ATM 감소와 현금 수납 거부 매장 증가에 대비해 역할을 재고하고 있으며, 지난해 하반기에는 '화폐유통시스템 유관기관 협의회'를 확대 개편했다. 이 협의회는 현금 없는 매장 실태조사나 해외 주요국 사례 조사 등을 통해 현금 수용성과 접근성을 점검하고, 중장기적으로 국내 ATM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국민의 현금 접근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힐링경제= 윤현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