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정명훈 [자료사진=연합뉴스]

세계적 명성의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이 한국인 지휘자 정명훈(72)을 차기 음악감독(Music Director)으로 선임했다. 이로써 정명훈은 247년에 이르는 라 스칼라 극장의 역사상 처음으로 이 권위 있는 자리에 오른 아시아인이 되었다.

라 스칼라 극장은 12일(현지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정명훈이 현 음악감독인 리카르도 샤이의 뒤를 이어 2027년부터 음악감독직을 수행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정명훈의 임기는 2030년까지로 예정되어 있으며, 이는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 총감독의 임기와 동일하게 종료된다.

이탈리아 유력 일간지 라레푸블리카의 보도에 따르면, 오르톰비나 총감독이 이사회에 정명훈의 음악감독 선임안을 공식 제안했고, 이사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주세페 살라 밀라노 시장이자 라 스칼라 극장 이사회 의장은 회의 후 "총감독이 이 인사를 제안했는데, 이는 그의 권리이자 의무"라며 "그는 선택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했고, 나는 그의 판단을 대신 평가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총감독의 제안을 지지했다"고 덧붙였다.

현 음악감독인 리카르도 샤이도 이번 결정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오페라 시즌 준비에는 긴 시간이 필요한 만큼 이번 결정이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며 "오페라는 작품과 지휘자, 연출, 성악가까지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다. 오늘의 결정이 적절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알레산드로 줄리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은 이날 "라 스칼라 극장은 전적인 권리와 자율성이 있으며 나는 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혀, 극장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1778년에 개관한 라 스칼라 극장은 전 세계 성악가들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오페라의 성지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나부코'(1842년)와 '오텔로'(1887년),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1904년) 등 수많은 걸작 오페라가 초연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닌 극장에서 공연할 작품 선정부터 단원 선발까지 음악적 부분을 총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역대 이 자리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시작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등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제 정명훈은 이러한 전설적인 지휘자들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정명훈은 처음에는 피아니스트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공동 2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1978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지휘자로서의 경력도 쌓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그는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독일 자르브뤼켄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등을 역임하며 국제적인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특히 정명훈은 라 스칼라 극장과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9년부터 아홉 차례의 오페라 프로덕션을 맡아 84회의 공연과 141회의 콘서트를 지휘했는데, 이는 역대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지휘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출연 횟수다. 또한 2016년에는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는 등 라 스칼라 극장의 해외 오페라 투어를 이끈 경험도 있다.

정명훈의 라 스칼라 극장과의 인연은 2023년 3월 극장 소속 관현악단인 라 스칼라 필하모닉의 첫 번째 명예 지휘자로 추대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이탈리아 매체 라레푸블리카는 정명훈이 베르디 해석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라 스칼라 극장에서 폭넓은 레퍼토리로 두각을 나타낸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밀라노 관객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정명훈은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수석 객원지휘자, 파리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예 음악감독, KBS교향악단 계관 지휘자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선임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역사적인 순간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음악가가 서양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국제 음악계에도 큰 의미를 지닌다.

정명훈의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 취임은 한국 클래식 음악의 세계적 위상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힐링경제=차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