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만났던 트럼프와 김정은 [자료사진=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비핵화 목표 포기를 조건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 의향을 공식 표명하면서, 10월말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 북미 정상외교 재개 가능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2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며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북한 관영매체들이 22일 보도했다.
이는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대화에 대한 개방적 입장을 직접 피력한 첫 번째 사례로, '비핵화 포기'라는 명확한 조건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동시에 북한의 확고한 핵보유 의지도 분명히 했다. 그는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해제시킨 다음 미국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다"며 "우리는 절대로 핵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또한 "제재 풀기에 집착하여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당시와는 상당히 달라진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북한은 제재 해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부분적 비핵화 조치를 하겠다는 북측 제안을 거절하면서 회담이 '노딜'로 끝났었다. 이번 발언은 북한이 더 이상 제재 해제를 위한 협상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입장 변화를 시사한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발언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방문 일정이 확정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31일부터 이틀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외교가에서는 이 기회를 활용해 2019년 6월 판문점에서의 북미정상 회동에 이은 또 다른 만남이 성사될 수 있을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만약 판문점에서 다시 회동이 이뤄진다면, 이를 발판으로 트럼프 2기 북미대화가 본격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미대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왔다. 지난달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추진하겠다며 "올해 그를 만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2기 출범 후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 잇달아 부르며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행정부 차원에서는 북한 비핵화 목표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용적 접근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대화에 나설 여러 이유가 있다고 분석한다. 집권 2기 출범 이후 각지의 분쟁 중재를 시도하며 노벨평화상에 대한 기대를 보여온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한반도에 영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북미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북러 군사협력 강화와 이란의 우라늄농축시설 재건 지원을 포함한 이란-북한 간 협력 등을 막기 위해서도 북한과의 협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관건은 김정은 위원장이 제안한 '비핵화 포기'라는 전제조건을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할지 여부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외교의 장을 만들기 위해 비핵화 원칙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등의 유연성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 종식이라는 두 난제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미간 적대관계 종식과 관련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비핵화의 기준을 낮추거나 장기적 목표로 돌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국의 이재명 정부도 북핵에 대해 '중단'→'축소'→'비핵화'의 단계적 해법을 내세우고 있어, 북미대화 재개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대화 과정에서 비핵화 목표를 명시하지 않은 채 대북제재를 대대적으로 해제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합의를 할 경우, 결과적으로 북한이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과 같은 국제사회의 비공인 핵보유국 클럽에 사실상 입성하게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앞으로 북미 사이에 물밑 접촉이나 정상간 서신외교가 추진될 가능성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미간 긴밀한 대북정책 조율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10월 말 경주 APEC 정상회의는 북미관계뿐만 아니라 미중관계에서도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이번 APEC에서 만날 예정이어서,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국 간 역학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발언이 실제 북미대화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힐링경제=김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