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의 필사적인 수비 [자료사진=연합뉴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라는 속담이 있지만,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는 '글러브가 없으면 무릎으로라도'가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그가 18일(한국시간) 보여준 믿기 어려운 수비 장면은 단순한 호수비를 넘어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이었다.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오라클파크에서 펼쳐진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 1번 타자 중견수로 출전한 이정후는 4회초 상대팀 얀디 디아스의 타구 앞에서 진기명기에 가까운 수비를 선보였다.

디아스가 외야 우중간 깊숙한 곳으로 강하게 때려낸 타구는 오라클파크 특유의 넓은 외야 공간을 향해 날아갔다.

오라클파크의 우중간 외야는 다른 구장들과 비교해도 유독 깊고 넓은 공간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외야수들은 일반적인 구장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커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3루타가 자주 나와서 '3루타 골목'이라는 의미의 '트리플스 앨리(Triples Alley)'라는 별칭까지 얻었을 정도다.

이정후는 타구의 방향을 정확히 읽고 전력질주했지만, 공을 잡기 위해 미끄러지며 몸을 던지는 과정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글러브를 갖다 댔지만 아쉽게도 한 번에 잡지 못했고, 타구가 글러브에서 빠져나가며 그의 다리 쪽으로 굴러떨어졌다. 보통이라면 이 순간 안타를 허용하며 주자를 내보내야 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정후의 야구 센스와 순발력이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공이 다리를 타고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순간, 그는 마치 본능적인 반사작용처럼 양 무릎을 재빨리 오므렸다.

마치 암탉이 소중한 알을 품듯 두 무릎 사이로 공을 완벽하게 잡아낸 것이다. 이 모든 동작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지만, 그 완성도와 창의성은 관중들과 동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정후는 무릎 사이에서 공을 조심스럽게 꺼낸 뒤 높이 들어 보이며 성공적인 아웃 처리를 알렸다. 함께 수비 지원을 위해 달려왔던 우익수 드루 길버트는 동료의 상상을 초월한 수비를 목격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벤치에서도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장면을 지켜본 MLB닷컴은 재치 있는 표현으로 이정후의 이름을 '정후니(Knee·무릎)'로 바꿔 부르며 그의 창의적인 수비를 기념했다. 무릎(Knee)과 정후(Jung-hoo)를 결합한 이 별명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며 야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팀의 해설자들 역시 이정후의 수비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마이크 크루코는 이정후가 무릎으로 공을 잡은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무릎으로 잡았다!"고 외쳤다. 듀에인 쿠이퍼 해설자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 수비의 가치를 평가했다. "누가 뭐래도 10년짜리 수비다. 하루, 한 주, 한 달, 한 시즌에 한 번 나오는 게 아니라 1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수비"라며 극찬했다.

이정후의 놀라운 '서커스 수비'는 단순한 개인적 화제거리를 넘어 팀 승리에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수비로 위기를 넘긴 샌프란시스코의 선발투수 로건 웹은 7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이어갔고, 팀은 최종적으로 7-1 대승을 거두며 7연패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보여준 이번 수비는 기술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순간적 판단력과 창의성이 결합된 종합예술품이었다.

글러브라는 기본 도구 대신 무릎이라는 신체 부위를 활용해 완벽한 수비를 해낸 이정후의 모습은 야구가 단순한 기계적 스포츠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창조적 영역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힐링경제=차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