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집행위 전경 [자료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대한 50% 관세 부과를 약 한 달간 유예하기로 합의하면서 양측간 치열한 무역 갈등이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번 합의로 당초 내달 1일로 예정되었던 관세 부과 시점이 7월 9일로 연기되면서, EU와 미국은 전면적인 무역전쟁을 피하고 협상을 통한 타결점을 찾기 위한 추가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번 관세 유예 합의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관세 부과 연기를 요청한 결과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23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협상을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50% 관세 부과를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파울라 핀호 EU 집행위 수석 대변인은 26일 정례브리핑에서 정상 간 전화통화에서 "협상을 가속하기로 합의했고 정상 간 연락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는 구체적인 통화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협상의 새로운 동력이 생겼고 정상급에서 관여가 있다는 것도 긍정적"이라며 "우리는 늘 그랬듯 합의를 타결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직접적인 개입과 설득이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며, 이는 EU가 미국과의 무역분쟁을 최고위급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세 유예 합의 이후 양측 실무진 간 협상도 즉시 재개되었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집행위원은 26일 오후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좋은 전화통화"를 했다고 엑스(구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셰프초비치 집행위원은 "집행위는 EU-미국 합의를 향한 건설적이고 집중된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일 것"이라며 "우리는 계속해서 연락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통화는 지난 23일 이후 사흘 만에 다시 이뤄진 것으로, 양측이 협상 재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통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양측이 '좋은 통화'라고 표현한 점에서 협상 분위기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무진 간 정기적인 소통 채널이 복원된 것은 향후 협상 진전에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애초 EU와의 협상 지연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50% 관세 카드를 꺼내든 만큼, 일각에서는 EU가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기존 제안보다 더 큰 양보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EU 집행위는 이미 자동차를 비롯한 공산품에 대한 상호 무관세를 비롯해 미국산 에너지, 무기, 일부 농산물 수입 확대 등을 제안한 상태다.

올로프 길 EU 집행위 무역담당 대변인은 협상안 관련 질문에 "여전히 상호 무관세 제안이 좋은 협상에 도달하기 위한 매력적인 출발점이라고 본다"고 답했다. 다만 '추가 양보안' 제시 가능성에 대해서는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EU가 현재까지 제시한 제안들은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동차 분야 상호 무관세는 EU의 핵심 산업인 자동차 업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며, 미국산 에너지 수입 확대는 EU의 에너지 다변화 정책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무기 수입 확대 역시 EU의 방산 정책에 변화를 의미할 수 있어 이러한 제안들이 얼마나 진전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EU도 협상에서 양보할 수 없는 선명한 한계선을 그어놓고 있다. EU 집행위는 지금까지 부가가치세(VAT)처럼 EU법 체계 자체를 건드리는 사안은 불가능하며, 영국에 적용하는 것처럼 미국의 기본(보편)관세 10%가 유지되는 것 역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는 EU가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이라는 EU의 근본 원칙을 훼손하는 협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부가가치세 체계는 EU 회원국 간 조세 조화의 핵심 요소이며, 이를 미국과의 협상에서 양보하는 것은 EU 통합 체제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세계 각국과의 관세협상에서 기본관세를 일종의 '하한선'으로 정하고 협상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어떤 국가와의 협상에서도 미국의 기본 이익은 보장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EU 주요 회원국들은 이번 유예 합의를 환영하면서도 조속한 최종 합의 타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EU 27개 회원국의 무역정책 결정권은 집행위가 쥐고 있지만, 주요 회원국들의 정치적 지지는 협상 추진력 확보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6일 베트남 하노이 방문 중 기자들에게 EU-미국 간 관세협상이 성공적일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과) 논의가 잘 진전되고 있다"면서 "가장 호혜적인 무역이 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관세율이 최대한 낮아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프랑스가 이번 협상을 적극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EU 통합의 강력한 추진국 중 하나이면서도 자국의 경제 이익을 중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해왔는데, 이번 발언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카테리나 라이헤 독일 경제장관은 "해결책을 찾을 시간이 6주 남았다"며 "그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해 대서양 양쪽의 원활한 무역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이런 입장은 EU 경제의 중심축인 독일이 미국과의 무역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강력히 우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독일은 EU 내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자동차 산업에서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다. 따라서 미국과의 관세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독일 경제에 미칠 타격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어, 라이헤 장관의 발언에는 절박함이 묻어있다.

이번 관세 유예 합의로 EU와 미국은 전면적인 무역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일단 피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7월 9일까지 약 6주간의 시간 동안 양측이 얼마나 실질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 지연에 대한 불만으로 50% 관세 카드를 꺼내든 만큼, EU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합의안을 도출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동시에 EU 자신의 핵심 이익과 원칙은 지켜가면서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미국 측에서도 EU와의 관계 악화가 장기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EU는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자 거대한 경제 파트너이기 때문에, 단기적인 관세 수입 증대보다는 장기적인 협력 관계 유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앞으로 6주간의 협상 과정에서는 양측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가 핵심이 될 것이다. 특히 자동차, 에너지, 농업 등 핵심 분야에서의 구체적인 합의 도출과 함께, 양측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조화시킬 수 있는 포괄적 틀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힐링경제=김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