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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며 지출한 비용은 별도의 소송비용 확정 절차 없이도 집주인에게 청구하거나 상계(相計)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이는 세입자 권리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는 중요한 판결로, 향후 유사 사례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임대인 A씨가 임차인 B씨를 상대로 낸 건물인도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북부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판결은 지난달 24일 선고됐다.

사건은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됐다. A씨는 이 아파트를 보증금 2억 원, 월세 50만 원 조건으로 2020년 5월부터 2년간 B씨에게 임대했다. 계약은 한 차례 연장됐으나, B씨가 월세를 연체하면서 임대차 계약은 2022년 8월 A씨에 의해 해지됐다.

A씨는 B씨가 퇴거하지 않자 법원에 건물인도 소송을 제기했고, 이에 맞서 B씨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해 등기부에 자신의 권리를 명시했다. B씨는 이후 2023년 1월 자진 퇴거했고, 보증금도 돌려받았다. 이에 따라 양측의 본격적인 법적 다툼은 비용 정산과 상계 여부로 좁혀졌다.

A씨는 B씨에게 미납 월세와 퇴거 이후 발생한 도배·번호키 교체 등 원상회복 비용을 청구했다. 반면 B씨는 임차권등기 과정에서 발생한 신청 수수료 및 변호사 선임비용을 A씨가 부담해야 한다며, 상계를 주장했다.

1심과 2심은 B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민사소송법상 소송비용은 재판이 확정된 이후, 소송비용 확정 절차를 통해 정산해야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따라서 B씨가 임차권등기와 관련해 지출한 비용은 이 사건에서 곧바로 청구하거나 상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차권등기명령 신청비용과 등기비용에 대한 상환청구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청구 절차에 대해서는 별도의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따라서 임차인은 민사소송을 통해 직접 비용을 청구하거나, 상계의 자동채권으로 삼는 방법으로도 비용상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소송비용 확정 절차 없이도 임대인을 상대로 비용을 직접 청구하거나 다른 채권과 맞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만 대법원은 “변호사 비용의 경우에는 소송비용 확정 절차를 거치는 것이 맞다”고 덧붙이며, 임차권등기 자체에 드는 법정비용과 변호사비용을 구분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면서 부담한 비용을 보다 신속하고 실질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과거에는 이 비용을 되찾기 위해 다시 소송비용 확정 절차를 거쳐야 했기에, 현실적인 장벽이 높았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임차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주택 임대차관계에서 보다 균형 잡힌 권리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법원의 해석에 따라 상계가 인정된 만큼, 향후 임대인과 임차인 간 비용 정산 과정에서 실무적인 혼선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한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소송 절차의 형식보다 실질적인 권리 실현이 중요하다’는 사법적 가치에 방점을 찍은 것”이라며 “특히 경제적 약자인 임차인의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