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연금 노령연금 (PG) [자료사진=연합뉴스]
국민연금 제도가 시행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조기노령연금 수급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정해진 시기보다 일찍 연금을 받는 대신 수령액이 평생 깎이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려는 은퇴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는 은퇴 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없는 소득 공백기를 견디지 못한 장년층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9일 국민연금공단의 최신 국민연금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25년 7월 기준 조기노령연금 수급자는 100만717명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 선을 돌파했다.
증가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뒤인 8월에는 100만5천912명으로 더욱 늘어났다.
성별로 살펴보면 8월 기준 남성 수급자가 66만3천509명, 여성 수급자가 34만2천403명으로 남성이 두 배가량 많았다.
이는 가계의 주 소득원이었던 남성 가장들이 은퇴 후 소득 단절을 메우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조기 연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음을 시사한다.
조기노령연금은 법정 지급 시기보다 1년에서 최대 5년까지 앞당겨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1년을 일찍 받을 때마다 연금액이 연 6%, 즉 월 0.5%씩 깎인다는 점이다. 5년을 당겨 받으면 원래 받을 연금의 70%밖에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조기노령연금은 일명 손해연금으로 불린다. 그런데도 수급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장의 현금 흐름이 절박한 은퇴자가 많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100만 명 돌파 현상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전조 증상은 이미 2023년부터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공표통계 자료를 보면 2023년은 조기 연금 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였다.
당시 1월부터 6월까지 상반기에만 신규 신청자가 6만3천855명에 달해 불과 반년 만에 전년도인 2022년 1년 치 전체 신규 수급자 수인 5만9천314명을 훌쩍 뛰어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런 폭증의 가장 큰 원인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뒤로 밀린 탓이었다. 국민연금은 재정 안정을 위해 1998년 1차 연금 개혁 이후 수급 개시 연령을 단계적으로 늦춰왔는데, 하필 2023년에 수급 연령이 만 62세에서 63세로 한 살 늦춰지면서 1961년생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1961년생들은 55세 무렵 은퇴 후 이제 만 62세가 되었으니 연금을 받을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으나, 제도 변경으로 인해 갑자기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퇴직은 이미 했는데 연금은 나오지 않는 이 1년의 소득 절벽을 버티지 못한 이들이 대거 조기 연금 신청 창구로 몰린 것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연구원의 당시 조사에 따르면 조기 연금 신청자의 상당수가 생계비 마련을 최우선 사유로 꼽았다.
단순한 생계비 부족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 부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연금을 미리 당겨 받는 경우도 상당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022년 9월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가 개편되면서 피부양자 자격 요건이 강화됐다.
직장에 다니는 자녀의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보료를 내지 않으려면 연 소득이 3천400만 원 이하여야 했으나, 이 기준이 2천만 원 이하로 대폭 낮아진 것이다.
즉, 공적연금을 포함한 월 소득이 약 167만 원을 넘으면 피부양자 자격을 잃고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매달 건보료를 내야 한다.
이 때문에 은퇴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연금을 일찍 신청해서 매달 받는 액수를 줄이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연금을 제때 다 받아서 소득 기준을 초과해 건보료를 내느니 차라리 손해를 보고 연금액을 깎아서라도 연간 수령액 2천만 원 선을 넘지 않게 조절해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결국 2025년 현재 조기 연금 수급자 100만 명 돌파라는 수치 뒤에는 은퇴 후 소득 공백을 메우기 위한 처절한 생존 본능과 건보료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은퇴자들의 서글픈 셈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조기 연금 수령이 장기적으로 노후 빈곤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의 생활비와 건보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금을 앞당겨 받으면 죽을 때까지 감액된 연금을 받아야 한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연금액이 최대 30%까지 줄어든다는 것은 노후 안전망이 그만큼 헐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비자발적 조기 수급자가 늘어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법정 정년 60세와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인 현재 63세, 향후 65세 간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은퇴 후 재취업 시장 활성화 등 소득 공백기를 메울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힐링경제=하현수 기자]